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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 예수그리스도 부활의 위로

by rabah153 2024. 1. 10.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57문에서 "예수그리스도 부활의 위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육신의 부활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57:“육신의 부활은 당신에게 어떠한 위로를 줍니까?

(What comfort does the resurrection of the body offer you)?

: 이 생명이 끝나는 즉시 나의 영혼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 올려질 것입니다. 또한 나의 이 육신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킴을 받아 나의 영혼과 다시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입니다(Not only shall my soul after this life immediately be taken up to Christ, my Head, but also this my flesh, raised by the power of Christ, shall be reunited with my soul and made like Christ's glorious body).

 

 

죽음은 우리를 위협하는 중요한 것인데, 왜냐하면 창조 시에 여호와의 의도(意圖)와는 아주 생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결단코 사람을 죽을 존재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은 죄 가운데로 타락한 결과이며 동시에 죄 위에 부과된 여호와의 의로운 심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죽음이 더 이상 우리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이 아니라는 사실을 얼마 전에 살펴보았습니다(주의 날 제16주일). 우리의 죽음은 죄의 대가를 치루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죽음은 죄 짓는 것을 종식하는 것이며 동시에 영생에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받으심으로서 죽음의 쏘는 것을 제거하셨습니다. 물론 죽음은 여전히 원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정복된 원수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우리를 놓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세력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서 우리는 우리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은 후에 일어나게 될 것에 관하여 제기되는 수많은 질문들이 있는데, 그리고 대단히 잘못된 사상들이 있습니다. 모든 생명이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생각은 엉터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 이 말씀은 신자들이 육신상의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죽은 이후에도 생명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의 몸이 죽어 우리를 만든 먼지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살아 있을 것입니다. 죽는 즉시로 우리의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서 승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실을 당신 옆에 있었던 오른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영혼이 죽은 후에 잠을 잔다는 생각 역시 잘못되었습니다. 죽음은 종종 수면을 취하는 것으로 일컬어지기도 했으나, 그러나 이렇게 말한 것은 단지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방식일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잔다. 그러나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취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말씀을 기록할 때에 제자들의 생각을 수정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께서 잠을 자므로 안식을 취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더라.”(요한복음 11:11f) 심지어 성경이 죽음을 수면(垂面)으로 말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10절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살아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심지어 우리가 죽었을 때조차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의식이 없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는 몇몇 본문이 있습니다. 전도서 9:5, 10에서 우리는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바 됨이라.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서 기자가 현세(現世)의 유리한 입장으로부터 모든 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이 본문을 공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 본문에 이어 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해 아래라는 어구는 무덤 이 편의 생활을 의미하는 현세를 일컫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무덤 다른 편에서 일어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단지 죽는 사람을 위해서, 이 땅에 그들의 생명이 끝이 난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이것은 10절이 의미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비슷한 방식으로 요한복음 9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느니라.낮은 생명을 말하고, 밤은 죽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께서 자신이 죽기 이전에 이생에서 할당된 과업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생에서 할당된 자신의 죽음 이후에 일들을 하실 기회를 얻지 못하셨습니다. 전도서 기자 역시 이와 같은 의미로 말한 것입니다. 이생에서 우리는 일을 해야 하며 이생에 속한 축복을 즐겨야 합니다.

 

성도들이 하늘에서 살아 있고 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성경 본문이 곳곳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순교자들의 영혼에 대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영혼들은 주여 얼마 동안이니이까?”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성도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요한계시록 20:4). 게다가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하늘에 있는 나사로와 지옥에 있는 부자 모두 분명한 의식이 있는 상태였습니다.

 

아마도 설득력이 있는 여러 본문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바울이 오히려 몸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는 본문일 것입니다(고린도후서 5:8; 빌립보서 1:21-24; 전도서 12:7을 참조하라). 이 분명한 증거로부터, 바울은 몸을 떠나서도 생명이 있고 또 실재한다는 사실과 혹은 영으로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마음에 상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즐길 것을 바라는 교통(communion)에 대해서 고백하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재에서 의식이 없이 수면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 오른편에 있는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리스도와 즉각적인 교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 역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친히 당신의 아버지 집에 처소를 예비하려 하고, 그리하여 그들이 당신이 있을 곳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한복음 14:1f을 참조하라).

 

죽음과 부활 사이의 이 기간 동안에 불경건한 자들에 대한 생명의 상태에 대해서 아주 조금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단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에서만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누가복음 16:19ff). 이 비유에서 우리는 부자가 고통 중에 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비유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이 비유이기 때문에 여기에 실린 모든 세부 사항을 문자적으로 취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여기에 대한 대답을 아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누군가가 추측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경건하지 못한 자는 부활 이후에(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심판을 미리 맛보는 것으로서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괴로움과 고통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57문 성경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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