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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장 18절 십자가의 극한 저주

by rabah153 2023. 12. 24.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37문-39문으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두 번째 단계 즉 그분의 고난 받으심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셨는가? 언제 고난 받으셨는가? 어떻게 고난 받으셨는가?”에 대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 목차 -

1.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37문-39문

2. 왜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셨는가? 

3. 언제 고난 받으셨는가? 

4. 어떻게 고난 받으셨는가?

십자가에 고난받아 죽으신 예수님

 

1.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 37문-39문

하이델베르그교뢰문답 제37문: "고난을 받으사" 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기간에, 특히 생의 마지막 시기에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습니다. 그분은 유일한 화목제물로 고난을 당함으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셨고 우리를 위해 여호와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하이델베르그교뢰문답 제38문: 그분은 왜 재판장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 그리스도는 죄가 없지만 세상의 재판장에게 정죄를 받으셨으며 이로써 우리에게 임할 여호와의 준엄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이델베르그교뢰문답 제39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달리 돌아가신 것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여호와께 저주를 받은 자이므로 그가 십자가에 달리심은 내게 임한 저주를 대신 받은 것이라고 나는 확신하게 됩니다

 

2 그리스도께서 고만 받은 이유

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우리는 고난이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난 받는 것은 죄인된 사람에게 부과된 여호와의 형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그와 같은 고난 받을 만한 잘못된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고난 받으셔야 하십니까? 여러분은 아마 여기에 대한 대답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한 역할을 맡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표자,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분이 우리의 형벌을 담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521절에서 여호와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여호와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의 죄 때문에 고난 받으셨습니다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을 기억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께서 단순히 죄값을 지불할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또 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호와의 사랑에 강조점을 두고, 그들은 여호와의 공의를 부인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공의로우심이 죄에 대한 완전한 대가를 지불할 것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아담과 하와에게 불순종에 대한 죄 값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맹세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취소하실 수 없습니다. 여호와는 신실하신데, 그의 약속과 요구에서 모두 신실하십니다. 이와 같이 속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여호와의 공의가 이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랑 안에서 여호와께서 사람의 구속을 추구하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중보자를 보내시는데, 우리를 위한 이 죄값을 치를 수 있는 의로우신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죄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를 담당하셨습니다.

 

3. 언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는가?

요청된 그 다음 질문은 언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십자가에 대해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을 단지 십자가에 제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이 가장 컸던 곳은 틀림이 없으나, 그러나 고난이 시작된 곳은 바로 성육신하시면서 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의 날 제14주일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하강 단계를 그렸을 때에 이 사실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은 그분의 생애가 시작될 바로 그 때부터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출생하실 때에 그분을 위한 여인숙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상징했던 바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나중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8: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거절당하심은 이미 그의 출생시에 시작되었습니다. 헤롯 왕이 예수님이 출생하자마자 그의 생명을 해하려고 위협하여 그분은 도망가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은 전 생애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지상 사역 동안 예수님은 오해받으셨고, 부당하게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사랑했던 자들의 약한 믿음과 당신을 증오했던 자들의 공개적인 적대감에 대해서 인내하셔야 했습니다. 이렇게 고난 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은 십자가에서 최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본 교리문답은 정확하게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고난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본 교리문답 역시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셨는지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몸과 영으로 고난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고통 받으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 본디오 빌라도 수하에 있는 사람들의 손에서 받으셨던 채찍질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통 받으심은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이 씌어지게 된 것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이 박혀질 때 당하신 고난에 제한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오게 되는 느릿느릿한 숨막힘의 가공스러운 고통에만 제한될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혼으로 당하신 고통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몸과 영혼으로 범죄하였기에, 우리의 중보자는 몸과 영혼 모두 고통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파멸로부터 우리의 몸과 영혼을 건지시려면 당신의 몸과 영혼 둘 다 고통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고통 역시 한 평생 동안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시면서 당신의 육신의 부모의 연약한 점들을 다 참으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형제들과 누이들의 모욕을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분은 유대인들의 모욕을 감내하셔야 했고 또 이보다 훨씬 더 여호와의 거절당하심을 감당하셔야만 했습니다. 세 시간 동안 태양이 빛을 발하는 것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성경에서 빛은 여호와의 은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어둠은 여호와의 진노 즉 여호와가 버리셨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 시간 동안 어둠이 있고 난 뒤에,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여호와, 나의 여호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가장 큰 고난이었습니다! 지상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보다 더 큰 육신적인 고통을 경험하나, 그러나 아무도 지상에서 그리스도가 감내하셨던 영적인 고통과 비교할 수 있는 영적인 고통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여호와의 구원의 드라마에서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사도신경에서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가 죽으신 시점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년대보다는 오히려 그 당시의 통치자들을 언급함으로(1:5눅 2:2) 사건의 일자를 알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이름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의 일자를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가 누구였고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자문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유대 땅에 로마의 최고로 높은 관리였습니다. 빌라도는 가이사를 대표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와 가이사는 여호와를 대표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에게서 받지 않는 권세란 없기 때문입니다(13:1). 이처럼 정부 관료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악하게 처신한다고 하더라도, 여호와를 대신해서 행합니다.

 

이처럼 빌라도가 언도한 심판은 여호와를 대신해서 선언한 것입니다(왕하 19:6; 19:11; 13;4). 대표자인 본디오 빌라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심판하셨던 분은 바로 여호와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직후에,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고, 그리고 바울은 마찬가지로 돌을 던져 죽였습니다(14:19). 비록 유대인들이 그때에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하였더라도(24:29; 26:4), 여호와는 예수님을 거리에 깡패들이나 성난 군중들에 의해서 죽도록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비록 조급한 공판이었지만, 공적인 절차를 따라야 했고, 그리고 여호와를 대신해서 재판하는 사람은 그의 실형을 언도해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바르게 이해하거나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을 대신하셨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저를 대신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그리스도를 재판했던 그 날에 발생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여러분과 저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사형언도는 우리 죄를 향한 여호와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위에 쏟아져야만 하는 여호와의 준엄한 심판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심판을 받았기에, 우리는 다가올 최종적인 심판의 날에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 것입니다. 죄 값이 이미 여러분과 저를 위해 다 치러졌습니다.

 

4. 어떻게 고난 받으셨는가?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던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형집행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그리고 이것은 사람과 여호와에 의해서 완전하게 거절당하신 것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땅과 하늘 사이에 매달려 계셨습니다. 사람은 그를 이 땅에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고, 여호와는 하늘에 들어오심을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필시 우리는 십자가에서 확약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여호와의 저주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자 위에 내려졌다는 것입니다(21:23; 3:13).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위에 부과되어 있는 저주를 짊어지셨다고 확신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 안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고난 받는 것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고통 받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불신자들처럼 고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다면, 왜 신자들이 고통을 받습니까?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여호와의 진노를 다 받으셨다면, 우리는 왜 여전히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을 여호와의 심판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중병을 앓게 되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벌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행동들은 그 행동의 벌로 주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서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은 AIDS에 노출되어 있습니다(1:27). 그러나 우리가 질병에 걸릴 때마다, 즉각적으로 우리가 했던 무언가를 근거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더 이상 여호와의 진노 하에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죄 값을 완전하게 다 치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한 우리의 죄의 결과들을 마주합니다. 때때로 여호와께서 우리가 만일 오만하다면 우리를 겸손케 하시려는 수단으로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때때로 여호와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거나 혹은 기질을 다듬기 위해서 고난을 사용하십니다(시편119:71; 7:2-4; 1:3; 5:3-4). 여호와께서 염두에 두고 게신 목적이 무엇이건, 우리는 결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신다거나, 아니면 우리가 죄 값을 치루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영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이 다 지불되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이생에서 우리에게 어떤 안 좋은 것을 보내신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