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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장 10-14절 우리의 선행은 여호와 앞에서 의가 될 수 없는 이유?

by rabah153 2024. 1. 18.

갈라디아서 3장 10-14절을 본문으로 [우리의 선행은 여호와 앞에서 의가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62문을 참조하여 함께 은혜를 나나고자 합니다. 

 

1.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62

우리의 선행은 왜 여호와 앞에서 의가 될 수 없으며 의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없습니까?

(But why can our good works not be our righteousness before God, or at least a part of it)?

 

: 여호와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여호와의 율법에 일치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최고의 행위라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Because the righteousness which can stand before God's judgment must be absolutely perfect and in complete agreement with the law of God, whereas even our best works in this life are all imperfect and defiled with sin).

 

이전 주의 날에서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분은 단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의 대표자로서 완전한 순종을 드리셨습니다. 그 결과로 여호와께서는 마치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아니한 것처럼 우리를 보시며,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의 모든 율법 가운데 단 하나도 범하지 않았고, 모든 계명을 완전하게 순종한 것처럼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에 의해서라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마치 믿음이 율법의 순종을 대체하는 것 즉 일종의 선행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듯이, 믿음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은 죄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선물입니다.

 

이제 본 교리문답은 다른 사상 즉 우리가 우리의 선행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주장을 피하고자 합니다.

 

로마교회는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사람 안에 아직 선한 것이 남아있다고 가르치며, 그리고 이 선에 의해서 사람은 여전히 선행을 수행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로마교회는 또한 이 선행은 구원을 받는데 필수적인 공헌을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사람에게 약함이 있고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들 또한 믿음을 통해서 오는 죄 용서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구원이 사람들의 선행에 의존한다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 교리문답이 첫 번째로 반박하고자 하는 오류가 바로 이런 거짓된 로마교회의 가르침입니다.

 

로마교회 : 믿음 + 선행 = 구원

 

우리가 이번 주의 날에서 주목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본 교리문답이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교리문답이 초반부에서 우리가 모든 악에로 기울어져 있고 그리고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주의 날 제2주일)고 말한 것을 고려할 때에, 이 사실은 아주 놀랍습니다. 우리 고백 안에서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실제로 로마교회의 견해와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이 단지 부분적으로 타락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전 주의 날에서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분은 단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우리의 대표자로서 완전한 순종을 드리셨습니다. 그 결과로 여호와께서는 마치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아니한 것처럼 우리를 보시며,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의 모든 율법 가운데 단 하나도 범하지 않았고, 모든 계명을 완전하게 순종한 것처럼 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에 의해서라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마치 믿음이 율법의 순종을 대체하는 것 즉 일종의 선행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듯이, 믿음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은 죄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선물입니다.

 

이제 본 교리문답은 다른 사상 즉 우리가 우리의 선행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는 주장을 피하고자 합니다.

 

로마교회는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사람 안에 아직 선한 것이 남아있다고 가르치며, 그리고 이 선에 의해서 사람은 여전히 선행을 수행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로마교회는 또한 이 선행은 구원을 받는데 필수적인 공헌을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사람에게 약함이 있고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들 또한 믿음을 통해서 오는 죄 용서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구원이 사람들의 선행에 의존한다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 교리문답이 첫 번째로 반박하고자 하는 오류가 바로 이런 거짓된 로마교회의 가르침입니다.

 

 

로마교회 : 믿음 + 선행 = 구원

 

우리가 이번 주의 날에서 주목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본 교리문답이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본 교리문답이 초반부에서 우리가 모든 악에로 기울어져 있고 그리고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주의 날 제2주일)고 말한 것을 고려할 때에, 이 사실은 아주 놀랍습니다. 우리 고백 안에서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실제로 로마교회의 견해와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이 단지 부분적으로 타락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다시 선행을 할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본성상 우리는 아무런 선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일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시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여호와로부터 받은 첫 번째 선물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 또한 다른 은사들 즉 죄 용서와 의()와 같은 은사들을 받습니다(주의 날 제23주일). 이 은사들에 덧붙여, 우리는 또한 갱신 즉 우리 마음의 갱신을 받습니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의 옛, 강퍅하고도 부패한 마음이 새롭고 유연하고 순수한 마음 즉 여호와와 그의 계명을 사랑하는 것으로 채워진 마음과 그분의 율법에 따라 행함으로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우리는 마음 이식(heart transplant)을 받았고,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우리는 자발적으로 선행을 할 수 있게 만들어졌습니다.

 

선행에 대해 놀라운 일은 이 선행들 역시 여호와로부터 온 은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어떤 일을 할 때에, 우리는 스스로를 칭찬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리고 여기에 대한 공로를 우리 자신에게 돌리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용할 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선행은 실제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여호와의 사역입니다. 에베소서 210절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가 하는 선행을 미리(beforehand) 준비해두셨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영원 전부터 여호와께서 우리가 행하는 것을 우리가 해야 할 것으로 계획하셨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선행을 하기 전에, 여호와께서 당신의 책에 이 사실을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분은 이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가 기꺼이 자원하여 우리가 행하는 선행을 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13절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우리가 하는 선행이 실제로 우리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선행들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사역들입니다. 선행들은 거주하시는 여호와의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님의 이러한 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구원을 획득하셨고, 또 그렇게 행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다시 선행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선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으로 여러분들은 로마교회가 순서를 뒤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알아 차렸을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선행이 구원을 이끌어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과는 정반대로 말한 것입니다. 구원은 선행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선행은 구원의 결과입니다.

 

 

로마교회 : 선행은 구원을 이끌어낸다.
개혁교회 : 구원이 선행을 이끌어낸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의 선행이 우리에게 어떤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선행 때문에 여호와로부터 보상 혹은 상급(reward)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비난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나는 너의 선행 때문에 감사하거나 보상을 줄 수 없다. 너희는 선행을 행한 것에 대해서 오히려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선행을 기꺼이 할 수 있도록 너희를 만든 이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한 선행이 우리에게 어떤 상급을 받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행하는 선행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일하신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역사하는 다른 능력 즉 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남아 있는 옛 본성이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이 옛 본성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불완전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대저 우리가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이사야 64:6)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우리의 행위를 선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러나 그 선행들은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완전한 선행만이 여호와로부터 보상 즉 상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누구든지 어떤 공로를 바라기 전에 100% 완벽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선행을 행하는 사람들은 상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시편 19:11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지킴으로 큰 상급이 있다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에서 우리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여호와께서 우리가 행하는 선행에 대해서 상급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 교리문답이 바르게 설명했듯이, 이 상급은 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란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호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선행에 의해서 여호와의 은총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 당신 자신의 사역을 상급으로 보답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 벨직 신앙고백서 제24항이 고백하고 있는 방식과 같습니다.

 

필시 한 본보기를 제시하여 이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 차를 세차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에게 이 일을 하라고 요구하고, 그에게 5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아들이 여기에 동의했습니다. 단지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아들의 팔이 모두 완전히 마비되어 있습니다. 그는 팔을 들 수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약속한 5달러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5달러라는 수고비를 벌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아들의 팔을 잡고, 그리고 아들의 팔로 세차 장갑을 끼워서 일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물통에 넣어 물을 적신 뒤에 차 옆면들을 문질렀습니다. 아버지는 이 차가 깨끗하게 될 때까지 반복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작업이 바라는 대로 다 되진 않았습니다. 여기저기에 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약속했던 5 달러를 주어 보답했습니다. 이 아들은 이것을 번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받을만한 자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5달러를 주려는 아버지의 의지였습니다. 여호와와 우리의 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선행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선행들은 결코 우리의 사역이 아니었고, 심지어 완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이 선행은 아무런 보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이런 선행에 보답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